민족시보 제926호 (00.10.1)


<기사2>

말지 한통련문제 보도

국내언론이 최근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후 국내 자유왕래가 차단된 한통련(의장 곽동의)에 관련된 기사를 일제히 게재,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월간〈말〉지는 기자를 일본 현지에 파견, 한통련 중앙본부를 직접 취재하고 곽 의장의 단독 인터뷰를 10월호(9월 18일 발행)에 게재했다. 〈말〉지는 '한통련의 진실―독재정권은 갔어도 반국가단체 족쇄는 여전'이라는 제목으로 한통련의 역사와 조직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했다.

〈말〉지는 간부들의 발언 등을 통해 '한통련의 진실'을 밝히고 있다. 또 자유왕래의 전제로서 '반성문'을 쓰도록 강요하는 당국에 대해 대응의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한겨레신문(9월 20일자)은 '한통련 소속 재일동포 입국운동' "준법서약·반성문 조건 철회돼야'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 총련동포가 한국을 방문하는 지금, 한국적을 가진 한통련 소속 동포의 자유왕래 거부의 부당성을 밝히고 있다.

한통련은 1978년 김대중씨구출운동 등 국내의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말지 기사

'재일 한통련의 진실'

안영민 기자

지난 30년 가까이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 한통련의 전신은 1973년 결성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한민통)이며, 1989년 한통련으로 재편됐다―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일본 교포사회 내에서 유신독재 타도운동을 적극 전개했던 한민통을 "조총련의 자금을 받아 친북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몰아 부쳤고, 1978년 이 조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했다. 그 후 한민통과 연락을 취하거나 그 회원을 만나는 것은 곧 간첩행위로 치부돼 관련자들에게는 모두 중형이 선고됐다.

유신독재 붕괴 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부가 차례로 들어섰지만 이러한 규정은 바뀌지 않았다. 한통련 관계자들에게는 (그들이 모두 한국 국적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입국불허' 조치가 발효중이다. 또 그들을 만나는 사람들 역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회합, 통신 죄가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9월 8일 오후 3시 일본 도쿄 메이지대학 부근에 있는 한통련 사무실을 찾았을 때, 한통련 간부들이 한국언론으로서는 최초로 자신들을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를 반갑게 맞이하기에 앞서 "신상의 문제가 없겠냐"며 걱정부터 해 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난 시절 숱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만났다는 이유로 고국에 돌아가 줄줄이 구속되는 것을 지켜봤던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기자의 신상부터 걱정한 그들

한통련 사무실의 정경은 흡사 한국의 사회단체 사무실을 연상시켰다. 50여 평(편집국 주 : 100여 평)의 사무실은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신문과 자료들로 더욱 좁아 보였다. 서고에는〈말〉을 비롯한 한국잡지와 단행본들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

"저희 회원들 내에서〈말〉지에 대한 신뢰는 대단합니다. 한국의 민중·통일운동의 동향과 전망을 이해하는데〈말〉지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습니다."

서고에 꽂힌〈말〉을 바라보는 기자에게 김정부 사무총장이 말을 건넸다. 교포 2세인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이어 한민통 의장을 역임했던 김재화(작고), 배동호 선생(작고)과 현 한통련 곽동의 의장의 뒤를 잇는 한통련 운동 2세대의 대표주자격이다. 그는 박정희 독재타도와 김대중 구출, 구명운동을 적극 전개했던 1970∼80년대 한통련의 활동이 1990년대 이후 본격적인 자주, 민주, 통일운동으로 발전해 나가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현재 한통련 사업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김 사무총장은 "동포사회도 이젠 3, 4세의 비중이 점점 커져가고 있다"면서 "갈수록 일본 사회로의 귀화, 동화 분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포들에게 민족주체성을 심어주고 조국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사업이 현재 한통련의 핵심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한통련은 말 그대로 고군분투 중이다. 총련의 경우 자체적으로 수십 개의 학교를 운영하면서 민족의식을 적극 높여나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국적을 가진 그들이 총련 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는 없는 처지다.(40만 회원을 거느린 민단의 경우 도쿄와 오사카 등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 수는 몇 개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통련은 자체적인 우리말, 우리역사 강습회를 통해 동포 3, 4세의 교육을 책임져나가고 있다.

그래서인가 이들은 한국정부의 교포정책에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정부의 교포정책이 "민족을 내세우며 일본사회 내에서 충돌하느니 차라리 귀화하는 것이 낫다"는 식이란 것이다. 역사 교과서 왜곡에서 드러나듯 갈수록 극우적 분위기가 확산되고, 한국인에 대한 차별정책이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일본에서 지금과 같은 추세로 한 세대가 더 흐른다면 "살길을 찾기 위해서라도 귀화하는 것이 더 현명할 지도 모른다"며 그들은 우려했다. 본국에서 버림받고, 일본에서 차별 받으며 살아야하는 동포들의 최종선택은 결국 '귀화'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정부의 교포정책, 차라리 귀화하는 게 낫다(?)

민족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한통련의 활동에서 특히 통일운동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황영치 선전국장은 그 의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지난 시절 동포사회는 뿌리깊은 분단, 냉전체제 속에 인간다운 삶마저 저버리길 강요받았습니다.(략) 이국 땅, 그것도 한(조선)민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민족의 통일은 이처럼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민족주체성 확립의 출발은 바로 남도, 북도 내 조국이란 통일정신입니다."

그러나 민족주체성을 찾기 위해 통일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그 때문에 조국정부로부터 더욱 배척 당하고 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씨의 방북으로 통일문제에 눈이 트인 그들은 1990년 남북 민간통일운동이 합의한 범민족대회 개최와 범민련 결성에 적극 나섰다. 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을 맡아 범민련 일본(지역)본부를 주도적으로 꾸려 나갔고, 1990년 1차 범민족대회 참여를 위해 남북 정부에 입국허가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쪽정부는 한통련의 입국을 '불허'했고, 1백여 명의 한통련 회원들은 범민족대회 해외대표단의 일원으로 '북부 조국'만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범민족대회 후 한통련은 동포사회 내의 통일의식 고양은 물론 양심적인 일본인들과도 한(조선)민족의 통일을 공유하는 장으로 매년 통일한마당을 개최해왔다. 특히 일곱 번째를 맞이한 올해 통일한마당은 6·15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더욱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손마행 사무부총장의 설명이다.

"올해는 도쿄, 오사카를 비롯해 모두 다섯 지역에서 통일한마당을 개최했는데 1만 명 이상이 모여 성황리에 진행됐습니다. 동포사회 내에서는 어느 때보다 통일기운이 높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눈물 속에 지켜본 동포들은 지금 민족적 긍지로 충만합니다. 해외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남북 간의 대립·대결 의식보다 민족동질성이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남북을 균형감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야말로 남북화해, 협력의 가교 역할을 충분히 해 낼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무엇을 반성하란 말인가"

남북정상회담 후 일본에서는 오랜 반목과 대립을 거듭했던 조총련과 민단간의 협력 분위기도 높아가고 있다. 도쿄를 비롯한 몇 몇 지역에서는 8·15행사를 민단―조총련 공동행사로 치르기도 했고, 조총련의 남쪽 고향방문 결정을 계기로 동포사회 내의 분단장벽은 일거에 무너지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쳐보면 여전히 '남남 분단'은 그대로다. 바로 민단과 한통련의 대립이 그것이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규탄으로 입장이 갈렸던 민단 내부는 1972년 군사정권을 지지하던 민단 지도부가 반유신정권 투쟁에 앞장선 개혁파들을 제명함으로써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박정희 정권의 비호아래 갈수록 어용성을 드러내는 민단 지도부에 맞서 동포단체로서 민단의 자주성을 지키려했던 개혁파들은 독자적인 조직―1973년 결성된 한민통으로 당시 일본에 체류하면서 박정희 정권 타도운동을 벌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초대 의장을 맡았다―을 결성해 국내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이 때부터 '반정부인사'로 몰린 이들은 고국정부로부터도, 그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던 민단으로부터도 철저히 배척 당해야만 했다.

김정부 사무총장은 최근 남북화해 분위기에 발맞춰 총련과의 교류를 시도하는 민단의 태도에 대해 "격세지감"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동안 동포사회 내에서 반북대결의식을 고취시켜왔던 민단이 총련과의 단합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고무적인 일임에는 틀림없으나 문제는 한통련에 대한 그들의 자세"라고 지적했다. 총련과의 단합을 말하면서도 철저히 한통련을 배제하려드는 민단의 처사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김 사무총장은 "그동안 동포사회 내 통일운동의 중심은 한통련"이었음을 강조하며 "민단이 진정으로 민족대단결을 이루겠다면 먼저 한통련의 실체부터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문제는 한통련에 대한 정부의 입장과 태도일 것이다. 군사정권을 극복했다고 자부한 문민정부도, 국민의 정부임을 강조하고 있는 현 김대중 정부도 한통련 문제에 대해서는 군사정권 시절의 인식을 뛰어넘지 못했다. 특히 한때 한통련과는 동지적 관계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이 한통련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지난 8·15에 즈음해 정부가 한통련을 비롯한 해외 '반정부인사'들에 대해 "반성문을 제출하면 고국방문을 검토하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김은택 부의장은 이렇게 반문했다.

"도대체 우리가 뭘 반성해야 한단 말입니까. 유신독재와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에 맞서 투쟁한 것을 반성하란 말입니까. 아니면 일본에서 온갖 차별에 맞서 민족주체성을 지켜내고,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위해 투쟁한 것을 반성하란 말입니까. 우리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자유로운 고국왕래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이전에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길이기도 합니다."

최근 정부는 과거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한통련의 '동지'들에 대해선 '민주화운동 관련 보상법'에 의해 명예회복은 물론 물질적인 보상까지 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해외의 반독재투사들에 대해서만큼은 '반정부인사'란 딱지를 붙여 놓고 기피한다는 것은 한통련의 주장대로 '역사바로세우기'와는 거리가 먼 처사임에 틀림없다.

한통련은 지난해부터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신들을 '반국가단체'란 올가미로 얽어매고 있는 법적 근거를 허물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한통련의 국가보안법 철폐 서명운동에는 10만 명이 넘는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동참했다. 그리고 지난해 말 이 서명용지를 한국정부에 전달하고자 일본의 사회단체 간부들이 방한하기도 했다. 고국으로 오는 길이 막힌 그들을 대신해서.

'조국은, 민족은, 동포는 하나'

9월 8일 저녁 한통련 간부들과 함께 한통련 사무실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 1960년 10월 전신인 민단 대한청년단이 명칭을 변경한 조직으로 민단은 1972년 민단 개혁파들을 제명하면서 이들의 영향아래 있던 한청까지 산하조직 자격을 박탈했다―중앙본부 사무실을 찾았다. 한통련 회원단체인 한청은 20∼30대의 교포 3, 4세를 중심으로 한 청년조직이다. 추석선물로 한 되짜리 소주 페트병을 들고 찾아온 비슷한 연배의 기자를 그들은 뜨겁게 맞아 주었다. 곧바로 인근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동포청년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일이 가장 큰 사업입니다. 동포청년들은 학교와 직장에서 자신이 한국사람임을 감추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 귀화하지 않고선 당장 생존문제부터 걱정해야하는 처지입니다. 하기에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히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란 여간한 결심이 아니고선 힘든 일이죠."

뒷골목 건달패로 살아가다 "한청 활동을 통해 뒤늦게 우리말을 배우고 민족적 자각을 얻었다"는 강성실 위원장(36)의 말이다. 동포청년들의 경우 그 위 세대들과는 달리 민족적 자각은 엷지만 대신 냉전이데올로기로부터는 자유로운 편이다. 따라서 스스로 민족정체성을 확립하는 순간 민족의 단합과 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고 한다. "한청 회원들을 모두 당당한 통일투사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는 이정수 부위원장(36)은 특히 "조국을 방문해 통일운동에 헌신하는 청년·학생들을 만나 민족의 운명과 통일조국의 미래를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다"며 소망했다.

이들에게 정권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때론 목숨까지 바쳐가며 민주주의와 통일의 길을 열어나간 고국의 청년들은 감동 그 자체인 듯 했다. 그러나 기자에게는 이국 땅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민족'을 버리지 않는 이들의 모습이 더욱 감동으로 와 닿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조국방문의 길은 막혀 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고향 땅, 친척들을 그리워하다 "고향방문의 길이 열리면 꼭 선산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세상을 등진 할아버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던 이들이지만 그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이다.

이번 정기국회 회기 중 한통련은 자신들의 '명예회복과 본국왕래 자유보장'을 허용해 달라는 국회청원을 준비중이다. 그러나 이기욱, 임종인, 김진국 변호사등 민변 동북아위원회 소속 변호사들이 담당하고 있는 이번 청원은 소개의원을 구하지 못해 난항을 거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970∼80년대 재야운동 출신 의원들마저 선뜻 나서려하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문득 한통련 사무실에 걸린 글귀가 떠올랐다. '조국은, 민족은, 동포는 하나다.' 과연 언제쯤에야 우리는 그들과 하나될 수 있을까.

<민족시보 www.korea-htr.com>


[HOME] [MENU] [지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