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907호 (00.2.21)


<자료>

한국전쟁 때의 정치범 처형실태 (4)

월간 '말'지는 2월호에서 군대와 경찰에 의한 서울, 대구, 대전의 집단처형을 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특집으로 보도, 새로 찾아낸 사진도 공개했다. 이 속에서 대구와 서울의 실태를 살펴본다.

광산 폐광에 던져 넣어

희생자유족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50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대구만 해도 1만명 이상이 집단학살됐다고 한다. 처형장은 20여개소 확인되었다. 이중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사람은 1,402명이며 나머지는 보도연맹에 소속되어 예비검속된 일반민중이다.

처형장의 한 곳으로 대구시에 인접하는 경산시 평산2동 159번지 코발트광산 폐광이 있다. 코발트광산은 일제가 식민지시대에 판 것으로서 45년 이후에 폐광이 되었다. 폐광에는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의 수직갱과 폭 3미터, 높이 1미터 정도의 수평갱이 있다. 1월하순 인근 주민의 안내로 폐광에 들어간 '말'지 기자는 수많은 유골을 발견했다.

당시 20세였던 주민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50년)8월 중순 군용트럭 수십대가 마을로 들어와 굴비 엮듯 손을 묶은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그후 광산 쪽에서 계속 총소리가 울렸다면서 "그들(경찰과 특무대)이 물러간 뒤 산 중턱에 올라가보니 수직갱이 시신으로 거의 찰 정도였고 시신 몇 구는 미처 갱에 던져지지 못하고 입구 턱에 걸려 널부러져 있기도 했어. 시쳇말로 사람으로 젓을 담근 식이었지"라고 말하고 있다.

주민들은 당시 포크레인으로 인골을 파내려 했으나 너무나도 유골이 많아 처리하지 못해 깊이 100미터가 되는 수직갱의 위험방지를 위해 그대로 덮어버렸다. 그러나 폐광 속에서 본 인골은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조사하면 얼마나 많은 유골이 나올지 모른다고 한다.

유족인 이복녕씨(71)의 부친 이병옥씨는 40년대에 전평(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대구지구운수노조위원장으로서 46년의 '10월봉기'와 뒤이은 파업투쟁 등에 참가하는 등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씨는 자신이 발굴한 20여군데 처형장소 어딘가에 부친이 묻혔으리라고 믿고 있다.

또 다른 유족인 김현구씨(63)의 부친 김도재씨는 당시 대구적십자 지사장이었다. 일제시대에 좌익운동을 한 경력이 있어 전쟁이 나자마자 곧 예비검속되었다. 어머니가 50년 8월 12일 대구형무소에서 면회를 한 뒤 다시 보지 못했다. 김씨는 부친이 대구형무소의 재소자 학살의 희생자가 됐을 것으로 믿고 있다.

이복녕씨는 60년 경산시 송현동의 밭에서 유골을 발굴했을 때의 참상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한 4백평쯤 되는 밭인데 폭 한1미터, 깊이 약 2미터 정도 되는 구덩이를 여러 줄로 길게 파고 시신을 막 묻었더라구. 손은 나일론이나 전선줄 같은 것으로 묶어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어, 그리고 한결같이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었어. 총으로 쏴 죽인거지. 형무소 재소자들은 아니야. 서울대나 고려대 버클이 나오고 옷주머니에서 도장도 나왔어"

20여 곳의 학살현장에서 유골을 발굴한 이복녕씨는 자신이 본 것만 해도 적어도 1만구는 될 것이라고 한다.

이복녕씨와 김현구씨등 희생자 가족은 60년 4·19혁명 직후부터 조사활동에 들어갔다. 60년 6월 16일 대구시 상공회의소에 희생자 가족 등 300여명이 모여 '경북지역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하고 이씨는 유족회의 조사부장으로서 각지의 학살현장에서 유골발굴의 선두에 서왔다. 유족회는 결성식에서 학살책임자는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등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을 결의하고 "다시는 이런 민족적 비극인 검은 역사의 무덤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진상조사활동은 중단되었다. 유족들은 반역죄로 체포되고 모든 증거자료는 소각되었다. 이씨와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씨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용공이적행위"위반으로 각각 5년과 1년의 징역을 살았다.

가슴에 표적을 달고

'말'지는 전쟁 발발전인 50년 4월 14일 '서울 동북10킬로미터'지점에서 39명의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학살된 사진을 공표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들. 가슴에 표적을 달고 눈을 가리워 두팔과 온몸이 기둥에 묶여있고 총살대가 정열하여 호령을 기다리는 사진. 총살 후에 권총으로 머리를 쏘고 시체의 밧줄을 끊기 위해 낫을 들고 있는 헌병의 모습 등, 다섯 장면을 찍은 충격적 사진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총살을 지켜보는 미국인의 모습이 보인다.

'말'지에 따르면 미국측은 그들이 공산주의자이며 정부전복을 기도한 것으로 이런 것은 남한에서 보통 실시되는 처형방식이라 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학살현장에 6명의 미군 무관과 장교가 참관하여 사진을 찍었으며 '3급비밀문서'로서 50여년동안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연재를 통해 밝혀진 것은 일제식민지시대에 독립투쟁을 하고 해방 후는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투쟁한 민중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공산주의자'라하여 남한에서 백수십만명이 학살된 것, '해방자'로서 진주한 미국이 이에 협력하여 기록을 '비밀문서'로서 50년동안 비밀로 해온 것, 박정희 군사정권이 모든 증거를 소각하고 역대정권이 일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았는 점이다.

희생자 유족들의 진상규명활동은 시작됐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않다. 앞으로 더 강력한 운동이 일어날 것이 기대된다. (끝)

<민족시보 www.korea-ht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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