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907호 (00.2.21)


<투고> 홍지웅 (민족학급 강사)

일본학교에 다니는 동포자녀의 민족교육 [중]

일반적으로 교육은 본인과 보호자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일본학교에서는 본인이나 보호자의 "일본인처럼 살고싶다. 참견하지 말라"는 반응에 직면할 때가 있다. 또 민족교육 실시가 강제적인 것처럼 잘못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이 생각해볼 때 일본학교에서의 민족교육문제는 동포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아이들이나 보호자가 실지로 한국인으로서 살아나간다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상황을 만드는 것이 민족교육에 있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자신이 민족의 일원임에 희망과 기쁨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조국이나 민족이 재일동포들에게 매력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일본학교에서의 민족교육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동포사회가 단결하고 그 힘을 통해 일본사회에 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조국통일은 필수조건일 것이다.

재일동포의 90%가 일본학교에 다니는 상황에서 동포사회가 일본학교에서의 민족교육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단결된 모습이 요구된다. 그리고 모든 민족단체가 여러 기회(민족학교, 민족학급, 지역에서는 동포청년에 대한 운동 등)를 통해 민족교육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일치하여 일본사회에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호소할 것이 요구되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오사카의 '민족학급'의 역사

오사카부에서는 공립 초·중학교에 통학하는 동포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민족학급'이 운영되고 있다. 한마디로 민족학급이라 하지만 학교에 따라 사정은 다르다. 주로 주1회 정규수업을 마친 후 과외시간에 실시되며 동포자녀들에게 민족의 언어와 문화, 역사 등을 가르치고 있다.

오사카에서의 '민족학급'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역사적 경위 속에서 태어났다.

1948년 한신(阪神)교육투쟁 '각서'에 의한 민족학급

1945년 해방직후 아이들에게 모국어나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민족학교가 재일동포들에 의해 속속 건설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에 의한 냉전대립이 깊어가는 가운데 48년, 당시의 GHQ(연합국점령군사령부)와 일본정부는 민족학교의 강제폐쇄를 일방적으로 명령했다.

동포가 다수 거주하고 있었던 한신지역에서는 많은 동포들이 폐쇄명령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오사카에서는 연일 부청에 강제폐쇄 철회를 요구하여 동포들이 밀려들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16살의 김태일 소년이 일본경찰의 총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이 '한신교육투쟁'이라 부르는 동포들의 격렬한 투쟁으로 오사카부와의 사이에 공립학교에 재적하는 동포자녀들이 과외시간에 민족교육을 받아도 좋다는 '각서'가 교환되었다. 이에따라 당초 30개교 이상의 공립학교에 민족학급이 설치되어 이를 담당하는 30여명의 민족강사가 있었는데 학교현장에서의 차별이나 몰이해, 행정의 무시책으로 그후 민족학급은 감소되었다.

80년대에 들어가 당초 임명된 민족강사나 민족교육촉진협의회(민촉협) 등 동포들의 행정부에 대한 운동으로 그 당시 존속했던 민족학급에 후임강사가 배치된 후 현재 '각서'에 따른 민족학급이 오사카부에 11개교가 설치되어있다.

70년대형의 민족학급

60년대부터 동화지구 학교에서 부락차별 등 반차별 교육을 내건 '해방교육'의 앙양 속에서 오사카시 니시나리구 나가하시초등학교에서 어느 동포 어린이의 "부락 어린이들과 똑같이 차별 받고 있는 우리도 자기 민족에 대해 더 알고싶다"는 요망이 나와 1972년에 나가하시초등학교에서 민족학급이 시작되었다.(계속)

<민족시보 www.korea-ht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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