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904호 (00.1.21)


<자료> 미군 기밀문서

한국전쟁 때의 정치범 처형실태 1

〈한국일보〉가 6, 7일 이틀동안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경찰이 충청남도 대전형무소의 '정치범' 1,800명을 포함하여 대전과 대구형무소 등의 재소자를 집단 처형했다는 사실을 사진과 함께 보도하여 한국사회에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 (관련 기사 초점)

이 사실은 지난해 12월 16일에 비밀 해제된 두 개 문서-2급 비밀, 한국의 정치범 처형'과 3급 비밀 '한국육군헌병에 의한 처형'에 의해 밝혀졌다.〈한국일보〉가 보도한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고위층이 총살 명령

한국의 정치범 처형(2급 비밀 R-189-50)

북한 라디오방송이 최근 남한에서 만행과 대량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주장들은 과장된 것이기는 하지만 전쟁발발 직후 남한 경찰에 의한 피의 처형들이 있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됐을 때 북한 인민군은 수천 명의 죄수를 석방했다. 본인 판단에 따르면 정치범들이 진격해 오는 적군에 의해 석방되지 못하도록 서울 함락 직후 수 주 내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처형됐다.

의심할 바 없이 총살명령은 최고위층에서 내렸는데 정치범들은 전선이 있는 마을들에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포로에 대한 한국군의 총살집행은 전선에서 즉결처분으로 제한됐고 후퇴한 후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는 대체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대전에서 벌어진 정치범 1,800명에 대한 처형은 1950년 7월 첫째주에 3일간에 걸쳐 집행됐다. 사진은 극동사령부 연락장교 애버트 소령이 육군무관의 라이카 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무관 사무실 요원에 의해 현상, 인화됐다. 문서분류-비밀 (SECRET)

신뢰도-가장믿을 만함 (A-1)

보고자-육군 무관 BOB E, EDWARDS 보고일자 1950년 9월 23일

첨부-이 문서에는 처형장면을 찍은 사진 18장이 첨부돼 있는데 재소자들이 대오를 지어 땅에 쪼그려 앉아 있고 '논산읍'이라는 차량 소속처가 선명히 보이는 트럭에서 경찰들이 내리는 장면, 군경이 처형을 위해 대열을 형성하고 있는 장면, 군경이 피살자 사이를 다니며 확인하는 장면 등이다.

한국 육군헌병에 의한 처형(3급 비밀 R-55-51)

피살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협력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던 사람들로 한국 육군 헌병들에 의해 1951년 4월 어느 날 대구 인근에서 처형됐다. 사진은주한미군군사고문단(KMAG)소속 군사고문이 촬영했으며 육군무관실이 현상·인화했다.

문서분류-비밀 (SECRET) 신뢰도-(A-1) 보고자 육군 무관 BOB E,EDWARDS중령 보고일자 1951년 5월 3일

첨부-이 문서에 첨부된 사진 7장은 한국군이 재소자 여러 명을 들판으로 데려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들어가게 한 후 육군헌병 1개 분대 병력이 일렬로 서서 총살형을 집행하고 흙으로 덮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4·3관련자도 포함

이 두 문서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사람은 제주도 4·3학살사건을 추적하던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이다. 이씨는 "당시 대전형무소에서 처형된 정치범의 일부는 4·3사태에서 무고하게 투옥된 제주도민이다"라고 밝혔다.

미국 시카고대학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6일 "당시 처형이 50년 7월 4일부터 6일까지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미군과 한국군은 똑같이 유엔군의 일원이었고 미군이 한국군의 처형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은 집단처형에 대해 사진까지 찍으면서도 이것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로이 에펠먼 수석미군역사가가 편찬한 공식 미군사에서도 한국전쟁시의 만행은 모두 공산군이 한 것으로 되어있다"면서 "미국은 역사를 은폐한 것만으로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커밍스 교수는 "이 사건은 노근리 사태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면서 "미군은 이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선교사 J.언더우드가 당시 대전교도소 재소자가 약 2,000명 수준이라고 말했는데 재소자 전원이 처형됐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국일보〉7일자 보도에 따르면 〈런던 데일리 워커〉지가 1950년 8월 9일자로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 북한군을 따라 다니며 취재한 종군기자 월밍턴은 20명의 목격자 증언을 인용하여 "(7월)2일 한국 경찰이 트럭 여러 대를 타고 나타나 현지 주민들에게 각각 200야드 깊이의 구덩이 6개를 파도록 했다. 재소자들은 총살되거나 칼로 머리가 잘려 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미군 장교들이 짚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현장에 나타나 처형 장면을 참관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민주·시민단체들은 강력한 미국비난 논평을 냈으며 진상규명에 나서고 있다. 또 〈한국일보〉에는 생존자와 유족의 증언을 보도, 각계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7일 '한국전쟁 당시의 정치범학살에 대한 논평'을 발표, "학살을 명령한 최고위층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이라면서 그 책임을 추궁하며 미군철수를 요구했다.

성균관대학 서중석 교수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과는 달리 재소자 처형의 경우, 수감자의 대부분이 타지역 출신이라 주민 증언을 참고하더라도 신원 및 처형규모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면서 "이번 문서는 그간 야사에 묻혀있던 정부차원의 조직적인 재소자처형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서 귀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개전초기 보도연맹을 비롯 30만명 가량

의 재소자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이중 상당수가 무고한 양민이었던 만큼 이번 계기를 통해 정확한 역사적 진실이 가려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도연맹은 반공을 표방한 이승만 정권이 남조선노동당의 지지자나 일제식민지하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의 관리를 위해 1946년 6월에 조직한 어용단체이다. 당시 정부는 이 단체 가입자에게는 사상적 면죄부를 부여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맹에 가입했으나 전쟁직후 그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숙청의 최초 대상자로 했다. 재소자의 대부분이 동연맹 가입자로서 거의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명이 집단 처형된 장소는 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내면 뒷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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