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873호 (99.2.1)


연재

김대중 씨 구출운동과 한통련 (9)

제2의 구출운동을 적극 전개

전두환·노태우 일파가 광주시민 2,000명을 학살하여 정권을 강탈

미증유의 항거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파멸되자 유신체제를 해체하고 민주화의 실현을 요구하는 한국 민중들의 의지가 활화산처럼 분출하는 '서울의 봄'이 왔다. 그러나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은 최규하를 대통령자리에 앉혀 놓고 그 막후에서는 성장한 민주세력에 대응할 수 있는 유신체제를 능가하는 독재정권의 재구축을 은밀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음모는 12·12쿠데타를 거쳐 5·17 계엄령확대 조치에 이어 그에 항거해 나선 광주시민들의 봉기를 야수적으로 탄압하고 권력을 탈취하는 '피의 쿠데타'의 단행으로 나타났다.

'피의 쿠데타'로 전두환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을 능가하는 무지막지한 군사독재정권이었다. 수천 명의 동족을 살육하고 집권한 그 경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미 2월에 복권한 김대중 씨를 '내란음모죄'에 걸어 사형을 선고하는 등 폭거를 서슴없이 감행하는 폭력집단이었다. 민주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말살책동으로 본국의 민주세력은 합법운동 공간을 일체 봉쇄 당하여 지하운동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개적인 운동은 한민통을 비롯한 해외운동세력이 짊어지게 되었다.

신군부 세력의 잔학성을 국제사회에 폭로

한민통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죄상을 세계에 고발하고 단죄하는 활동과 함께 김대중 씨 구출을 위해 다시 분기하였다. 5·17 쿠데타 후 곧바로 광주시민의 투쟁을 적극 지지 성원하는 운동을 전개해 온 한민통은 신군부의 무력탄압으로 광주봉기가 진압된 엄중한 사태에 대처하여 6월 1일부터 전두환의 광주시민의 학살만행을 규탄하고 김대중 씨 말살음모를 폭로하며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활동을 맹렬히 벌였다.

특히 운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재빨리 광주시민들의 영웅적인 투쟁모습과 탄압군의 포악무도한 살인만행의 현장을 녹화한 자료를 모아 영화 '한국 1980년-피의 항쟁'을 제작, 6월 10일부터 일본 각지에서 상영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광주에서 저지른 전두환 일파의 만행을 재일동포들과 일본인에게 광범하게 선전 확인시켰다. 또한 이 영화를 유럽과 미주의 동포민주단체에게도 보내 그곳에서도 상영활동을 벌이게 하여 반전두환과 김대중 씨 구출운동의 전선을 확대해 나갔다.

군사독재통치하에서 전두환 일파의 광주시민학살 현장을 영화로 제작하여 위력한 선전무기로 활용된 것은 이 영화가 유일무이한 것이다. 이 영화상영운동의 파급효과는 지대하였다. 전두환 일파의 살인만행을 규탄하고 광주민중봉기와 관련시켜 김대중 씨를 말살하려는 음모에 대한 규탄과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세계도처에서 메아리치게 되었다.

그러나 포악무도한 전두환 일파는 끝내 군사재판에서 김대중 씨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대중 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두환 일파의 폭거에 치솟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한민통은 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전두환 일파의 타도와 김대중 씨 구출을 당면 2대과업으로 결정하고 그 실현에 모든 힘을 집중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한민통은 80년 2월에 해산했던 '김대중선생구출대책위원회'를 다시 부활시키기로 하였으며 행동으로서는 암혹재판의 사실을 제때에 폭로하는 성명, 기자회견, 강연회, 선전문배포 등을 최대한으로 강화하고 이와 배합하여 단식투쟁, 대중집회와 시위, 일본 국회에 대한 청원긴급서명운동, 유엔에 보내는 100만 명 서명운동을 벌였다. 일본 국회에 대한 청원서명운동에서는 70만 명의 서명을 받아 냈으며 유엔에 보내는 서명은 목표를 초과하여 120만 명의 서명을 모아 각각 관계 당국에 제출하였다. 대중집회와 가두시위도 6월 1일부터 김대중 씨가 미국으로 '추방'되기까지 수십 차례나 진행되었다.

일본전국에서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라'는 파도를 일으켰다

특히 한민통은 구출운동의 분위기를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그 해 8월 한달 만해도 4일과 8일 그리고 15일에 세 번이나 대규모의 집회를 개최하고 집회 후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이와 병행하여 8월 13∼14일 양일에 걸쳐 일본, 미주, 유럽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주단체 대표 100여명이 모여 '긴급해외한국인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김대중 씨 구출운동을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김대중선생구출해외한국인연락회의'를 구성하였다. '긴급해외한국인대표자회의'는 김대중 씨 구출운동을 확대 강화시키는 데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뜻깊은 회의였다.

한민통은 또한 일본을 비롯한 권위 있는 국제기구와 세계양심세력에 김대중 씨의 구출을 호소하고 그들과 각종의 공동행동을 연속적으로 벌였다. 우선 한민통은 일본의 각 정당, 노동단체, 시민단체, 법조계, 문화계 등에 김대중 씨 구출운동에 대한 협력과 효과적인 행동을 취해 줄 것을 호소하는 요청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였다.

한민통의 요청에 일본 각계는 적극적으로 호응해 나섰다. 그리하여 일본의 각계 단체와 인사들은 일본 각지에서 다양한 구출운동에 일어서게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가장 위력한 단체인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약칭 총평 조합원수 600만 명)는 간사회의에서 김대중 씨 구출운동을 벌이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하고 그에 따라 각계층별 조직과 인사를 망라한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를 80년 7월 11일에 발족시키고 선차적으로 1,000만명서명운동을 벌일 것을 결정하였다.

총평의 주도하에 '김대중씨구출일본연락회의'가 구성됨으로써 그것을 계기로 일본인 속에서의 김대중 씨 구출운동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구출운동의 열기가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80년 10월 9∼10일의 양일간에 도쿄에서 일본 법조계와 문화인이 중심이 되어 '김대중재판조사·규탄국민법정'이 개정되었다. 한민통대표와 구출위대표가 국민법정 증인으로 나가 김대중 씨의 말살을 노린 전두환 일파의 암혹재판의 실태를 낱낱이 폭로하고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몰아붙인 전두환 일파의 정치적 의도까지 남김없이 까발리었다. 한민통과 구출위대표의 증언은 국민법정의 관계자들과 그 법정 방청인으로 참가한 1,000여명의 일본인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신심을 깊여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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