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864호 (98.10.11)


연재

김대중 씨 구출운동과 한통련 (3)

납치사건과 구출운동

남치사건

한민통 결성을 일주일 앞둔 8월 8일, 백주에 김대중 씨가 도쿄의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한국중앙정보부(KCIA)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날 김대중 씨는 도내 이이다바시의 그랜드팔레스 호텔의 2210호실에서 민주통일당의 양일동 당수와 오찬을 들면서 간담 중이었다. 그후 방을 나오자 5, 6명의 KCIA요원이 약물로 마취, 지하주차장으로 데려가 자동차로 납치한 것이다.

김대중 씨의 눈이 가려졌었기 때문에 도주경로는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목격자나 증인, 김 씨 자신의 증언으로 대략의 개요가 해명되고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자동차에 태워진 김대중 씨는 도메이, 메이신 고속도로를 거쳐 간사이에 끌려가 거기서 일단 KCIA의 안가에 들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에 태워졌다. 김 씨는 배에서 발에 돌을 매달아 언제든지 바다에 던져질 수 있는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 때 비행기가 날아와 뭔가 연락을 주고받은 후, 김 씨는 그대로 한국에 끌려갔다. 그리고 8월 13일 밤, 서울의 자택부근에서 해방됐다는 것이다 (비행기 비래에 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대중 씨 구출운동의 전개

한민통의 출범은 김대중 씨 구출운동으로 막을 열게되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국제범죄는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없었던 일이며, 더구나 국민적 교류가 별로 없는 한일간에 일어난 사건인 만큼, 일본인의 반응은 별로 민속하지 못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한민통 결성에 합류한 재일민주세력은 과감한 구원운동을 전개했다. 8월 8일 김대중 씨가 납치된 사실을 알게된 재일민주세력은 당일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KCIA의 범행임을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자민당 AA연 등의 정계, 언론, 미일정부에 김대중 씨의 구출을 호소했다.

73년 11월 8일 대회에서 김대중 씨의 재내일을 요구하는 고 김재화 의장대행사건직후부터 권력 측은 '북한의 범행' 설이나 김 씨 '자신의 자작 자연설' '내분 설' 등을 퍼트려 구원운동을 혼란시키거나 방해하려했다. 재일민주세력은 총력을 다해 이를 물리치고 사건이 KCIA의 범행이며 김 씨의 목숨이 위태로우며 일각을 다투고 있음을 널리 호소하여 순식간에 일본국내의 여론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구원운동으로 하여 김대중 씨는 목숨을 건진 것이다. 13일, 한민통 결성발기대회 직후에 김대중 씨가 서울의 자택부근에서 풀려났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모두들 김 씨의 무사함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린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씨의 신변의 위험은 그것으로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흉포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수중에 있는 이상, 언제 어떠한 수단으로 말살될지 몰랐다. 실지로 박 정권은 김대중 씨를 '국사범'으로 만드는 책동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선거위반사건을 날조했다.

한민통을 결성한 재일민주세력은 김대중 씨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일본의 각계각층과 세계의 여론에 김 씨의 원상회복과 진상규명, 책임자의 처벌을 끊임없이 호소했다.

김대중 씨 구출위원회는 8월 9일 이후 잇달아 성명을 발표, 15일에는 한민통 결성선포대회를 마친 후 제 2부에서 '김대중 선생 납치규탄 재일한국인대회'(3천명)를 열고 시위를 했다. 그리고 한민통과 구출위원회는 공동주최로 한달 후인 9월 8일에 도쿄 닛쇼 홀에서 '김대중 선생 구출 한국인궐기대회'(2천명)를 연 것을 필두로 9월 23일에는 오사카 국민회관에서 '김대중 선생 구출 재일한국인 간사이대회', 10월 13일에 도쿄 요미우리 홀에서 '김대중 선생을 구출하고 본국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지원하는 재일한국인민중대회'(2천명), 11월 8일에 도쿄 젠덴쓰 홀에서 '본국학생 지식인의 민주구국투쟁을 열렬히 지지하고 김대중 선생의 재방일을 요구하는 재일한국인대회' (8백 명), 그리고 납치사건의 정치 결착을 빌미로 일본정부가 박 정권에 경제원조를 재개하려는데 대해 12월 9일에 도쿄 요미우리 홀에서 '본국동포의 구국투쟁에 재일동포도 호응하자! 본국동포의 구국투쟁을 지원하고 한일각료회의를 반대하며 김대중 선생의 재방일을 요구하는 재일한국인대회'(천5백명)를 연속적으로 열어 본국동포의 구국투쟁을 지지하고 한일각료회의 반대와 김대중 씨의 원상회복을 호소했다.

또 다음해 2월 3일에는 대통령긴급조치에 반대하여 도쿄 요미우리 홀에서 '박 정권의 "긴급조치권"발동의 폭거를 규탄하는 재일한국인대회'(천5백명)를 열고 6월 7일에는 김대중 씨에 대한 선거위반혐의의 부당 소환을 규탄하여 '박 정권의 군사재판을 규탄하며 애국적 학생과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재일한국인대회'(1천여명)를 여는 등, 그때마다 대회와 시위를 벌이며 대대적인 거리홍보활동을 전개했다.

김대중 씨 구출운동은 계속되었다. 박 정권이 김 씨를 말살하려하거나 정치적 자유를 박탈하려는 데 대해 그때마다 단식농성투쟁이나 서명운동 등, 다종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면서 일본과 국제 여론을 환기하고 구원운동을 펼쳐 박정희 정권의 야욕을 막았다.

김대중 씨 구출운동을 통해 납치사건의 범인인 KCIA=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규탄하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게 되어 김대중 씨와 합의한 반독재민주화, 남북통일운동을 전진시키게 된 것이다.

한편 김대중 씨 구출운동은, 그때까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나 민주단체 속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국내외의 한국민주화운동의 실정을 널리 알려 그 후 크게 발전하게되는 한일연대운동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당시 양심있는 일본인 가운데는 한국의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는 나머지 한국내의 민주화운동을 반공주의의 보수적인 것으로 보아 과소평가 하는 경향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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