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818호(97.4.21)

<논설>

혼란에 빠진 대선 앞둔 정계 판도(1)

대선 불투명할 수도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신한국당 지지도가 17%로(통과 이전은 30%) 무려 13%나 급락하였으며, 엉망진창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보 청문회 이후 지지도가 더욱 떨어지면 여당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을 것이다. 국민들의 입에서 "대통령 下野(하야)"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흘러나오는 냉혹한 시점에서 신한국당이 한보-김현철 청문회 국면을 파행으로 이끌 경우 여당의 홀로 서기가 불가능해져 대통령 선거(대선)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정태수의 변죽 울리는 말 한마디로 거물 정치인들이 검찰에 불려 가고 일부 대선 주자들이 '정 태수 리스트'의 독배를 몸부림치며 거부하고 있다. 92년 대선 자금·김현철 의혹과 관련된 '몸통 리스트'는 숨긴 채 '깃털 리스트'를 통하여 청문회의 김을 빼는 정태수와(민주계 일부 인사가 희생되더라도) 김현철 씨만은 구출하려는 '청문회 정국 원격조종' 세력이 이심전심으로 제휴(?)하여 한보 사태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정 태수에게 최면 당한 정치권의 하부구조가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가운데 권력의 진공상태에 파고든 '음지의 정치세력'이 준동하고, 어수선한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정계의 무중력 상태가 장기화되면 선거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할 수도 있다. 4% 이하의 지지도에 허덕이는 김영삼 씨가 도대체 대선을 주도할 힘이 있는 것인지, 그에게 주도력이 없다면 누가 어느 정치집단이 무슨 수단으로 권력의 공백을 메우며 대선을 치를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할 때이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 이후 불과 몇 달 사이에 정치 판 자체의 붕괴 조짐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無黨派(무당파)가 급증하고(4월1일자 <동아일보> 여론조사:'지지정당 없다' 46.3%) 재야 독자후보 선호도가 높아지는데도(3월20일자 <한겨레 21> 여론조사:'재야 독자후보 지지' 42.4%) 3김 정치밖에는 대안이 없다고 들이대므로 정치가 겉도는 것이다. "때묻은 기성 정치인은 이제 물러가라! 도덕과 정치력을 겸비한 참신한 정치인이여 어서 오라!" 이렇듯 정치적 메시아를 대망하는 대중들의 절절하게 타는 가슴에 못박는(노동법) 날치기 정치·부패 정치·(김현철 씨의) 황태자 정치가 판치고 있으며, 이러한 현대판 '3政(정) 문란'의 주범인 신한국당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로 번지고 있다. 김영삼 씨를 비롯한 사이비 개혁정치가에게 사기 당한 국민들의 배신감·절망감·증오심·반정부 심리가 복잡하게 얽혀, 정치 판을 뒤집어엎어야 속이 풀릴 성싶은 '6월항쟁 때와 비슷한 민심'의 활화산이 분출구를 찾고 있다.

국민들의 비감 어린 심경을 헤아려 화끈하게 속풀이 해 줄 정당·정치인은 없을까? 이제는 3김 씨가 나서도 안될 것 같다. 90년대 들어 정치이성이 더욱 날카로워진 국민들에게 밀려 공존-공멸의 기로에 서 있는 3김 정치로는 대중들의 아픈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 것 같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김영삼 씨와 신한국당이 정치를 잘못하여 여당으로서의 한계가 드러나고 신한국당의 위기가 권력구조·국가의 위기로 비화되는 과정에서 2김의 야당도 정당성의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청산하기 위하여 3김 정치의 민중 지향적 혁신이 이루어지거나, 무당파 유권자 중심의 제3세력이 득세하는 정계의 '물갈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민이 스스로 나서서 정치 판의 '판 갈이'를 결행할 것이다.

김영삼·신한국당 '동반 추락'

그런데 한보-김현철 청문회 국면에서도 제정신을 못 차리는 신한국당은, '정계의 물갈이 정도를 넘어선 판 갈이를 벼르고 있는' 국민들의 저주를 받고 있다. 김영삼 씨의 무능한 정치가 신한국당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신한국당의 반국민적인 행태가 김영삼 씨의 정치생명을 단축하는 '동반 추락' 현상이 여권을 강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선의 실시 여부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한국당의 대선 주자 9명(9龍)의 정치적 운명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9룡의 대권경쟁에 관한 평론은, 정상적인 정치일정에 의하여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는 낙관적인 예측을 전제로 한 것일 뿐이다.

정태수 리스트·황장엽 리스트의 광풍에 휘말린 대선 주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대통령 꿈을 버려야 하는 이른바 '리스트 정국'의 초반전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한보-김현철 청문회는 대권경쟁의 제1차 관문에 해당된다. 대선의 판도를 좌우할 리스트 정국에서 무사히 살아남는 여야 정치인만이 선거전의 본선에 진출하게 될지도 모른다. 9룡 가운데 한보 리스트에 들어 있는 최형우·김덕룡·김윤환 씨가 이미 위험수위에 있으며, 리스트 정국의 주도권을 쥐려는 세력 사이의 암투에서 밀린 후보는 백기를 들게 될 것이다.

한보 사태의 원인 제공자인 민주계가 정태수 리스트의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보 리스트를 언론 등을 통하여 흘리는 과정을 보면, 고도의 정략에 따라 민주계를 협살하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를 감지한 김덕룡 씨 등의 민주계는 리스트 정국의 덫에 걸렸다고 판단한 나머지 '민주계 죽이기 음모론'을 퍼뜨리며 ('보이지 않는 손'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회창 진영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한보-김현철 비리와 관련하여 국민들로부터 도덕적 심판을 받아 수세에 있는 민주계가 당내 권력투쟁에서 지리멸렬할 경우 민주계 3룡(최형우·김덕룡·이인제)의 사퇴가 불가피해진다.

만일 민주계에서 한 사람도 결선에 오르지 못하면 민주계가 다른 유력한 후보 진영에 의하여 흡수통합되든지, 민주계 중심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고육책으로 범민주계의 실익을 최대한 보장할 다른 후보를 옹립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세포분열이 일어나 구심력이 약화된 민주계의 대동단결 노력이 헛수고에 그쳐 정권 재창출의 주도세력이 될 수 없음이 확인되면, '민주계 몰락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신한국당의 존재 이유가 상실되므로 '9룡 구도'가 깨지거나 경선 자체가 불가능해지거나 9룡 이외의 인물이(김영삼 씨의 돌출적인 지명으로)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다.

영입파 4룡 유리한 상황

제1차 관문에서 한보-김현철 비리와 연루되어 누가 경쟁대열에서 탈락할지 알 수 없으나 현재로서는 민주계 주자들이 불리하다. 그렇다면 신한국당과 인연을 늦게 맺는 바람에 한보로부터 돈을 받을 기회가 없어서 상대적으로 신선한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는 영입파 4룡(이회창·이수성·이홍구·박찬종)에게 행운의 열쇠가 쥐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민정계의 김윤환 씨가 또 다시 '킹 메이커' 역할을 하거나, 이한동 씨의 역부족이 드러나면 영입파 4룡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다가온다. 그러나 영입파 4룡은 국민여론에서는 유리하지만 당내여론에서 불리하고, 국민여론에서 뒤지는 민주계 3룡이 당내여론에서 우세한 '기묘한 엇갈림'이 9룡 구도를 실타래같이 만들고 있으므로, 뒤얽힌 9룡 구도를 풀어헤칠 '합종연횡의 방정식'을 자체개발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그나마 한 가닥 남아 있는 김영삼 씨·민주계의 영향력이 최종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한편 영입파 4룡이 당내 여론을 확보하는데 민주계의 지지가 유리하지만 국민 여론을 얻는데 김영삼 씨의 지명이 불리할 경우(97년 2월호 <WIN>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를 '찍겠다'가 22.2%, '찍지 않겠다'가 62.8%이다) '김영삼과의 차별화'를 선거전략으로 내세우는 '정치 코미디'가 씁쓰름한 웃음을 자아낼 것이다. 김영삼 씨가 대선 후보에게 '계륵'과 같은 존재로 전락한 현실이 신한국당의 모든 것을 대변해 준다.

경제불황으로 민심이 크게 이반하고, '정치공황'이 국민의 마음을 허탈하게 한 결과 심리적 공황으로 이어지는 '복합 공황'이 정계의 대폭발을 예고하면서 대선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한보의 부도가 '국가의 부도'로 치닫게 만든 국난의 장본인인 김영삼 씨는 '단말마의 정권유지 쇼'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신한국당 정권은 이미 역사적인 청산대상이 된지 오래이고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대에 올려질 날만 기다리고 있다. 신한국당 정권이 역사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면, 정치적 혼란을 틈탄 헌정중단이나 민심을 무시한 '제2의 3당 합당'을 예방하여 순조롭게 정권을 이양하는 것이다.

이정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