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1133(08.04.01)


<4.3특집 3>

 제주4.3에서 6.15공동선언, 참된 해방·통일로

재일동포의 화합, 조국통일과 '제주4.3'

 

-제주도4.3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와 우리들의 과제-

 

  '4.3사건'이란?

  60년전 1948 4 3, 제주도에서 민중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경찰과 우익단체를 일제히 습격했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거듭되는 도민들에 대한 경찰의 과잉한 폭력탄압과 우익단체에 의한 잔인한 테러행위에 보복하는 공격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5월에 예정되고 있었던 한반도 남측지역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일본군을 무장 해제한 미국과 소련이 독립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북에 각각 주둔하고 있었으며 남측에서는 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고 있었다.

  이 선거는 당시 소련이 통치하고 있었던 북측지역을 배제하고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측지역만 친미적 단독정부를 수립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을 의미했다.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폭력과 테러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제주도민중의 투쟁은, 분단에 반대하고 조국의 참된 해방, 통일조국의 실현을 바랬던 민족적 대의의 투쟁이었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4.3사건'으로 불려지고 있다.

  유해 발굴도, 위령도 인정받지 못했던 유족들

  그러나 이 투쟁은 미군과 그 앞잡이가 된 독재자들에 의해 '빨갱이(사회주의자)에 의한 반국가적 폭동'으로 왜곡되어 처참한 보복이 일어났다.

  1년간에 5만 여명이 학살되었고 군·경찰의 진압작전이 끝날 무렵까지 당시 30만 도민중 8만 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라면 전도에 휘발유를 뿌려 30만 도민을 몰살해도 좋다"(당시 미군정 경무국장)는 발언에서 상징되듯이 무고한 탄압이 자행된 것이다.

  제주도민들에게 더 큰 비극은 가족의 유해를 발굴하는 것도, 위령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폭도의 유족'으로서 오랫동안 차별 받으며 소외된 것이었다.

  왜곡되고 역사의 어둠 속에 매장된 '4.3'

  사건 후 제주도를 제외한 남측지역에서 단독선거가 강행되어 그해 8 15 '대한민국'(한국)정부가 수립되었다. 9 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두개 정부가 발족한 것이었다.

  '4.3'은 남북에 정부가 발족하기 이전에 분단에 반대하여 통일조국 건국을 요구하는 투쟁이었으며 어느쪽 일방만을 '국가'로 인정하고 한쪽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반국가적 행위'란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패전·일본에 '당근', 해방·조선에 '채찍'

  해방직후 단기간에 '건국준비위원회'가 한반도 전역에 결성되어 독립조국을 건국하려는 민족의 자주적 기운이 전국에 넘치고 있었다.

  이것은 민족의 해방, 자주독립을 향한 전민족적 기운의 고양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등 사상적 이념이나 정치적 주의주장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와 같은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민중의 행동을 경계하여 이를 소련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왜곡하고 우익세력을 시켜 탄압을 강화해나갔다.

  4.3봉기의 배경에는 이러한 미군의 점령정책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있었으며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측전역 사람들의 압도적인 여론이기도 하였다.

  패전한 일본에는 과거 군국주의를 일소하기 위한 민주화정책을 취했던 미군이 해방된 조선에서는 과거의 군국주의자를 동원하여 우익세력을 강화해나갔다.

  평화적 시위행진에 경찰이 발포

  '4.3' 한해 전인 1947 3 1, 한반도 각지역에서 역사적인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3.1'기념행사가 열렸다.

  제주도에서도 많은 도민들이 참가하여 성대한 기념대회가 열려 집회후 참가자들은 '미군철퇴' '친일파 추방' 등을 요구하며 시위행진을 했다.

  이 평화적 시위행진에 대해 경찰이 갑자기 발포하여 6명이 사망, 무력으로 해산시킨 후에도 다수의 청년을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으로 살해했다.

  이 폭거에 도민의 분노는 폭발했다.

  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여 동맹휴교, 관공청 공무원들까지 파업을 하는 등 전도의 제주도민중이 궐기했다.

  '계엄령'과 경찰·극우단체의 폭력탄압

  이에 대해 미군정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본토에서 무장경찰과 극우청년단체를 대량 파견하여 폭력으로 민중의 투쟁을 분쇄했다.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북측지역에서 피난해온 반공 폭력집단) 등이 이때부터 제주도에 조직적으로 파견되어 경찰과 일체가 되어 도민에 대한 테러행위를 일상적으로 자행하여 도민의 공포와 분노는 높아갈 뿐이었다.

  4.3봉기는 미군의 잘못된 점령정책에 대한 불만을 배경으로 경찰의 과잉한 폭력탄압과 극우단체의 테러행위로 도민의 생명과 생활이 위협받는 상황아래 일어난 것이었다.

  존엄을 걸고 일어난 민족적 항쟁

  제주도4.3 민중항쟁은 폭력과 부정, 민족분단의 위기 앞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점령정책,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조국의 참된 해방, 통일을 요구하며 용감하게 일어난 민족사에 빛나는 민중항쟁이었다.

  소박하고 온화한, 가난해도 상부상조의 정신이 넘치는 제주도 민들은 다만 독립된 조국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그러한 소원이 부당한 폭력으로 짓밟힌 것은 민족으로서,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4.3민중항쟁은 민족통일이라는 대의를 배경으로 한, 제주도민중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건 민족적 민중항쟁이었던 것이다.

  시작된 진상규명과 정부의 사죄

  1987 6월 전국으로 확산된 민주화투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크게 전진했다.

  이러한 상황아래 유족이나 양심적 인사들에 의한 헌신적 노력이 거듭되어 1999 5월 김대중 정부 하에서 '4.3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어 마침내 사건의 진상규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0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남북관계가 그때까지의 불신과 대립에서 화해와 교류로 전환됨으로써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2003 10, 노무현 정부아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어 '국가권력에 의한 강경한 진압으로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정부의 입장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대통령이 처음으로 도민들에게 사죄했다.

  참된 진상규명과 역사적 평가, 앞으로의 과제

  반세기가 경과하여 비로소 그때까지 공개적으로 위령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던 '반국가적 폭도'라는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어둠에 묻혀있던 유골 발굴작업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4.3'의 역사적 평가는 1980년의 '5.18광주사건' '민주화운동'이었다고 공식적으로 평가되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법제화된 사례와 비교해보아도 너무나 불충분한 것이다. 진상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4.3특별법' 폐지를 주장하는 한나라당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여당 한나라당은 1 21일 새 정부의 조직개정안을 국회에 제출, '4.3특별법'을 폐지하도록 제안했다. 실용주의를 내걸고 과거 역사청산에 관한 여러 기구를 축소 통합하여 2010년에는 폐지한다는 것이다.

  '4.3특별법'을 실리에 맞지 않는 쓸데없는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의 본질은 진상 규명이 두려운 것이며 제주도 사람들은 또다시 업신여기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일제히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4.3'에 대한 반응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전망하는데서 시금석이 되는 중요한 과제이다.

  4 9일 한국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된다. '4.3'을 또다시 역사의 어둠 속에 묻으려는 반동적 인물이나 정당에 대해서는 준엄한 심판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진정한 명예회복은 항쟁정신으로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

  분단에 반대하고 조국의 참된 해방, 자주독립을 요구했던 제주도민중의 투쟁은 그 숭고한 항쟁정신이 역사적으로 계승되어 6.15공동선언으로 결실하고 남북 화해와 교류를 촉진하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시대를 개척했다.

  당대를 사는 우리들이 민중항쟁의 영령, '4.3' 희생자들에게 화답하는 길은 자주 통일을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또 통일운동이 촉진되는 과정에서 '4.3'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평가와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재일동포사회의 화합을 촉진하고 남·북·해외동포의 단결된 힘으로 하루빨리 통일을 실현하는 것은 재일동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민족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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