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1118(07.08.01)


<추도사>

 둘도 없는 동지 이덕삼 씨를 추모아여

 

손형근 한통련중앙부의장

 

  너무나 소중한 후배이며 친구인 고 이덕삼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난 지 49일을 맞이했다. 장례식을 끝내고 날이 갈수록 슬픔과 그리움이 더해 가는 것은 아마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이 동지가 오사카의 건국고등학교를 졸업한 70년대 중반 경, 오사카에서는 반 박정희 민주화운동의 풍운이 급박해지고 있었다. 정의감과 민족심을 그 누구보다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는 당연한 듯이 재일한국청년동맹(한청)오사카부본부 이쿠노북지부 문을 두드렸다. 1, 2년동안의 지부활동 속에서 그는 민족운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고 내가 한청 오카부본부 위원장에 취임한 직후인 79년부터 동본부의 상근활동가가 되었다.

  이 동지가 상근활동가였던 시기, 조국의 정세는 군사독재자 박정희의 죽음, 서울의 봄, 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 군사독재의 집권과 반미투쟁의 고양으로 격동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국내외의 운동으로 전두환 국사독재정권은 서서히 몰리게 되었다.

  국내의 운동에 뒤지지 않고 일본에서 우리들의 운동도 치열하게 벌어지는 가운데 그는 정치스테커를 붙이며 거리 홍보, 집회에서의 성토, 단식투쟁, 연극운동, 조직확대 활동 등 190센티가 넘는 큰 키를 주체스러워 하면서 모든 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모국어 습득에 관심이 강했고 실력 향상도 빨랐다. 청년학생의 공동투쟁을 열심히 추진하면서 한청니시나리지부와 다이세이일조공동투쟁 강화에 진력했다.

  어느 날 선전차를 민단회관 앞으로 몰고 나가 "전두환 타도I"의 구호를 외치다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민단간부와 충돌한 적도 있었다. 특히 입에 거품을 물고  내뿜는 그의 열렬한 성토는 많은 동포청년과 일본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 동지의 적극성과 박력을 언제나 믿음직스럽게 느끼면서도 그 천진난만스러움 때문에 무슨 일을 저지르지나 않을까 위원장으로서 항상 조마조마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칼 한 자루로 거악과 대결하는 돈키호테를 방불케 했다.

  그의 가정은 어머니와 남동생 둘의 4인 가족으로 장남으로서의 역할도 자각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가족에게 계속 민족적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 결과 남동생 둘도 민족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사리사욕 없는 순수한 그는 민족운동 속에서 실로 많은 선배, 친구, 후배들이 있었다.

  1986년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던 이 동지는 잠시 휴양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건강을 회복한 최근에는 한통련오사카본부의 열성적 활동가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한통련오사카본부의 한국어강습회 강사를 담당하면서 민족성을 견지한 재일동포의 권리문제에 대한 소론을 수 차례에 걸쳐 자주(한통련오사카본부 통신)에 발표하기도 했다. 다감한 청년시대를 거쳐 장년이 되어 조용히 사색하게된 그에게 또다시 기대하는 것이 많았던 만큼, 너무나 돌연하고 빠른 죽음이 원통하기 짝이 없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우리는 이덕삼의 이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덕삼 동지도 분명히 그 아무 걱정 없는 웃음 띤 얼굴로 자주통일의 길을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다정하게 지켜 보아줄 것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2007년 7월


[HOME] [MENU] [지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