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870호 (98.12.11)


연재

김대중 씨 구출운동과 한통련 (8)

.박정희 군사독재를 드디어 타도

2단계운동을 설정하여 더 한층 강력한 민주화투쟁전개

카터 미 대통령의 방한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정치를 두둔하며 한국 민중의 반군사독재 민주화투쟁에 타격을 가하게 되는 것으로서 이는 카터 대통령 자신이 천명한 이른바 '인권외교'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한민통은 본국 민중들의 카터 방한 반대투쟁에 맞추면서 카터 방한 반대투쟁을 김대중 씨 구출운동과 결부시켜 벌이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한민통은 1979년 4월 23∼24일 양일에 걸쳐 각급조직대표자회의를 가지고 내외 정세를 분석하고 당면과제로서 카터 방한반대투쟁을 적극 벌이며 김대중 씨 납치사건의 정치결착을 백지화시키고 김 씨의 원상회복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을 더 한층 강화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민통은 각급조직대표자회의의 결정에 따라 카터 미 대통령에게 방한중지를 요청하는 요청서와 편지보내기운동을 적극 벌이며 6월 4일에는 '김대중 선생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카터 미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재일한국인대회'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에 앞서 한민통은 김대중 씨의 원상회복을 위한 지원을 일본의 각 정당과 노동조합, 사회단체·시민단체에 요청하였다. 특히 6월 14일에는 배동호 상임고문과 정재준 구출대책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소노다 일본 외상을 직접 만나 정치결착의 백지화와 김대중 씨 의 원상회복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한민통의 투쟁에 호응하여 일본의 양심적 국회의원은 일본 국회와 자기 나라 정부를 상대로 정치결착의 백지화를 주장해 나섰으며 법조계 인사와 문화인들로 구성된 '김대중사건고발인단'은 오오히라 일본 수상에게 납치사건의 완전해결을 촉구하는 요망서를 제출하였다. 또한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회 전국회의는 6월 25일부터 농성투쟁에 돌입했으며 일본 노조·시민단체 등 60개 단체로 구성된 '카터방한반대·김대중씨원상회복요구 6월행동실행위원회'도 이 날 집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위원회는 이에 앞서 6월 23일부터 3일간에 걸쳐 도쿄 도내에서도 사람 왕래가 가장 많은 주요지역에서 삐라 살포 등 가두선전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집중투쟁의 결과로 김대중 씨 납치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하는 여론은 더 더욱 높아갔다. 한민통은 이러한 성과에 바탕하여 납치사건 발생 6주년을 맞아 기자회견을 가지고 김 씨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아울러 일본 노조 등 양심세력과 공동으로 '김대중씨사건의 정치결착철회를 촉구하는 8·8집회'를 약 1,400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어 7일 후 광복절 34주년에 즈음하여 '민주회복 . 통일촉진 재일한국인대회'를 개최하여 박정희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투쟁을 강화할 것을 내외에 호소하였다.

한편 YH사의 여공 김경숙 양의 죽음과 신민당 총재의 제명을 계기로 정세는 급변해 가고 있었다. 박 독재정권에 대한 쌓이고 쌓인 각계 민중의 분노는 극점에 이르고 있었다. 한민통은 앙양하는 반독재투쟁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8월 28일에 또다시 '각급조직활동자회의'를 소집하여 '김경숙양의 학살만행과 신민당에 대한 탄압을 규탄하고 YH 노동자, 농민회, 신민당의 투쟁을 지원하는 집중 월간투쟁'을 9월 1일부터 30일까지 일본의 주요도시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하였다.

1979.9.2 도쿄이 결정에 따라 집회, 시위, 가두선전, 성명발표, 주일대사관과 영사관 등에 대한 항의행동 등 다양한 운동을 연속적으로 벌였다.

9월 1일부터 시작한 월간투쟁을 빛나게 관철한 한민통은 월간운동을 총화하고 반독재투쟁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대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10월 7일에 '각급조직활동가회의'를 가졌다. 회의에서는 9월 월간투쟁을 박 독재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1단계 투쟁으로 규정짓고 2단계운동을 설정하여 박 정권 타도운동을 더 강력히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박정희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각계 민중들의 치열한 투쟁은 마침내 부마민중봉기로 폭발하였으며 이에 당황한 박 정권은 부산과 마산에 각각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령하였다. 그러나 그 계엄령과 위수령은 바로 박정희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로 되고 만 것이다. 박정권이 가장 두려워 했던 전민항쟁의 불바람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반박이 반미로 비화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이다. 민중봉기를 막는 길은 박정희를 제거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계엄령선포 8일만에 심복중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유신잔당 청산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

박정희의 죽음으로 서슬푸런 유신독재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신독재를 무력으로 떠받쳐 온 군부세력과 유신잔당들이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 막후에서 유신체제의 재편을 획책하고 있었다. '유신의 지속이냐', '민주화의 실현'이냐는 역사의 갈림길에서 각계 민중들은 계엄령의 철폐와 유신체제의 완전청산, 민주헌법의 제정, 모든 양심수의 석방과 복권, 민주거국정부수립을 요구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1980.2.29한민통은 본국 민중들의 투쟁에 합세하여 유신잔당 청산투쟁과 함께 김대중 씨의 복권운동을 강력히 벌였다. 한민통은 그해 연말까지 정세보고회 민중집회 등을 3번 (11월 2일, 11월 13일, 12월 2일)이나 개최하였다. 80년에 접어들어서도 신년회 모임을 여느 때 보다 큰 규모로 조직하여 성대히 치룸으로써 민주화촉구와 김대중 씨 복권에 대한 여론을 비상히 높혀 나갔다. 다음으로 한민통은 2월 9일∼10일의 양일에 걸쳐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유신세력 일소와 민주헌법쟁취, 김대중 씨 복권을 위한 투쟁을 더욱 세차게 벌였다. 민주화의 촉구와 양심수의 석방과 민주인사의 복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이제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시대의 요청으로 되었으며 유신잔당들도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간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있었던 김대중 씨를 비롯한 687명의 민주인사들은 80년 2월 29일에 복권을 쟁취하게 되었다. 납치사건 이래 하루도 쉬임없이 만난을 무릅쓰고 굴함없이 싸워 온 한민통은 김대중 씨 구출운동에서 1차적으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였다.

한민통은 민주구국과 김대중 씨 구출운동을 선두에서 싸워 온 높은 자부심을 안고 3월 24일 임시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구출운동을 자랑스럽게 총화하고 김대중씨구출대책위원회의 해산을 결정하였으며 이와 함께 한민통의 지도부를 개편하고 김재화 의장대행을 의장으로 추대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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