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보 제822호(97.6.11)

논설

국민에게 도전한 대통령 '담화'

지난달 30일 김영삼 대통령이 발표한 '정치개혁에 관해 국민들에게 드리는 말씀'은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찬 독재자의 어록이었다. 진정으로 고개 숙여 반성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면 관용을 베풀겠다는 민심을 역행한 '5·30 담화'는 국민을 향한 도전장이다. 더욱이 자신의 뜻대로 정치개혁이 되지 않으면 '중대결심'을 하겠다는 부분은 담화라기보다는 국민·야당에 대한 협박이다. 국민 앞에서 읍소해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하야 정국(대통령의 하야를 정치권에서 정식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정국)'에서 국민에게 도전장·협박장을 보내는 저의가 오히려 의심스럽다. 정치적으로 이미 식물인간이 된 김영삼 씨가 살아남기 위하여 나라 망치는 '깜짝 쇼'를 저지를까 두렵다.

'중대결심' 발언으로 국민 협박

92년 대통령선거 자금의 총체적인 규모와 비교적 자세한 내역을 듣고자 하는 국민들은, 김 대통령이 대선자금에 관하여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민심을 등진 5·30 담화는 '대선자금의 총규모나 내역을 5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가려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고 변명하면서, '대선후보 조차 선거자금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선거제도·정치관행 탓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한보·김현철 사태의 원죄인 대선자금의 해법 없이 금권선거 구조를 개선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은 김영삼 씨 자신이 아닌가? '지난 일(92년 대선자금)은 묻어 버리고 97년 대선에서 고비용 정치를 마감하기 위한 법률 개정을 적극 추진하자'는 제의는 국민들을 달래기 위한 얄팍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의 정치개혁 제의가 좌초된다면 불가피하게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목청을 높인 김영삼 씨의 뻔뻔스러운 협박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김 대통령의 '중대결심' 발언은 무언가 살벌하고 음산한 느낌을 준다. 유신체제를 따르지 않으면 중대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며 긴급조치를 잇따라 발표한 박정희 파쇼, 87년의 6월항쟁 때 중대결심을 내비치며 군대를 동원하려고 했던 전두환 파쇼의 악습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중대결심의 내용에 관한 추측을 만발하게 해놓고 야당·국민들의 뒤통수를 치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도대체 헌법의 한도 안에서 중대결심(정치개혁안의 국민투표 회부, 국민들의 하야론·야당의 퇴진론에 맞서는 대통령 신임투표 실시)을 하겠다는 것인지, 군사파쇼들처럼 안보를 핑계삼아 비상사태를 선포하겠다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야당·진보진영의 진로

앞으로의 정국은,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의 중대결심(민심)'과 '김영삼 씨의 중대결심(金心=김심)'이 맞서는 꼴이 될 것 같다. 민심과 김심이 갈등·대립하는 국면에서 야당·진보진영은 어떠한 길을 선택해야 하나? 야권은 국민회의·자민련을 중심으로 '반독재투쟁 8인 공동위원회'를 가동 중이고, 전국연합·민주노총·참여연대 등 10개 사회·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민주개혁 사회단체 연대회의'가 출범했다. 대선을 앞두고 몇 달 사이에 벌어질 예측 불허의 정국에 대처하기 위하여 야권과 재야가 제각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나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연합 전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다.

김영삼 씨의 몰락이 3김 정치의 붕괴를 초래하는 점을 우려하는 야권의 두 김 씨(김대중·김종필)가 'DJP 공조'의 틀을 깨고 반독재투쟁에 앞장서지 않기 때문에, 김영삼 정권 타도투쟁이 재야·학생의 전유물로 되어 있다. 국민들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중대결심'의 시점을 고심하고 있는 터에 야당의 두 지도자는 3김정치 구도 아래에서의 정권교체를 꿈꾸고 있으니 범국민적인 민주연합 전선이 겉돌 수밖에 없다. 대통령선거에 4 번째 도전하는 김대중 씨의 초조함·절박함이 전면적인 반독재투쟁을 주춤하게 만들고 있다. "대선자금 규명 투쟁은 하겠지만 김 대통령의 하야에는 반대한다"는 김대중 씨의 전술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받들어 정치세력화를 이룩해야 하는 과제가 진보진영에게 주어져 있다. 대선자금 공개 요구 투쟁을 문민파쇼 타도운동과 연결하면서 범국민적인 민주연합 전선을 형성해 온 진보진영은, 5·30 담화 이후 새로운 각오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한보·김현철 사태에 짓눌려 숨죽여온 김영삼 씨가 '중대결심'이라는 배수의 진을 친 다음 '3김 청산' 카드로 대선 정국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야당이 '정권교체'를 들고 나와 여당의 '3김 청산'에 맞불을 지르면 선거판이 '3김 청산'과 '정권교체'의 대립구도로 좁혀져 진보진영의 설 땅이 비좁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진보진영에서 제아무리 훌륭한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도 비좁은 공간에서 전국민을 상대로 득표 활동·선거운동을 전개하는 데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진보진영은 '3김 청산' '정권교체' 보다 더욱 확실하게 득표력을 지닌 카드를 제시해야 한다. 추상적인 민주화 요구에 그치지 말고 국민의 실생활을 진보의 방향으로 이끌 결정적인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대선자금 공개투쟁·서명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정치적 공간·민주연합 전선을 확대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공개정치 영역을 압박해 들어가는 것이 좋다.

김영삼 씨는, '정치의 안정을 위하여 대통령의 하야 요구를 애써 유보하고 있는' 민심을 역이용하여 야당·국민을 협박하고 있다. 이판사판으로 죽을 목숨이니 오기로 버티어 보자는 속셈이 5·30 담화에 깔려 있다. 촌각을 다투고 있는 정치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김영삼 씨가 재야를 인질로 삼은 정치공작을 벌일지도 모른다. 문민파쇼가 정권 재창출을 위하여 파놓은 함정을 우회하며 김영삼 정권을 포박하는 고도의 전략을 수립할 때이다.

최강우 기자